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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iness·music/상식

[상식] 펌 - 광해군의 실리 외교와 인조 반정

by 멀라머가 2021. 9. 24.
[상식] 펌 - 광해군의 실리 외교와 인조 반정 | happiness·music/상식

멀라머가 2018. 12. 21. 13:51

http://blog.daum.net/choclub/12908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5-2

광해군의 실리 외교와 인조 반정

교과과정

초등학교 > 5학년 > 2학기 > 사회 5-2 > 3. 유교 문화가 발달한 조선 > 4)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목차

  1. 1. 광해군의 중립 외교
  2. 2. 인조 반정
  3. 3. 척화파와 주화파

1. 광해군의 중립 외교

후금의 성장
17세기 조선의 북쪽에는 명나라와 여진족이 있었어. 당시 조선은 명나라를 아버지의 나라로 여기고 여진족을 오랑캐의 나라라며 무시했지. 그런데 그런 여진족이 세력을 키워 ‘후금’을 세우더니 명나라를 공격하기 시작했단다. 광해군은 전후 복구 사업으로 정신이 없었지만, 후금의 움직임만은 예의주시하고 있었단다. 당시 국제 정세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던 광해군은 후금이 명나라를 침입하기 전에 조선을 먼저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후금을 자극하지 않고 잘 다독거리는 정책을 취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힘을 키워 후금의 침략에 대비하려 하였지.

생각하건대 우리 나라의 인심이나 병력으로는 아직 아무것도 할 수 없으니 어찌하겠소. 저들을 다독거리면서도 스스로 힘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좋은 계책이라고 할 수 있소. 둘 가운데 어느 하나를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인데, 도대체 착실하게 실천하지 않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오.
- 『광해군일기』

명과 후금의 긴장
광해군은 수시로 후금의 상황을 보고하게 하고, 혹시나 있을지 모를 후금의 침략에 대비해 무기를 수리하고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지. 또한, 서울 주변 요충지의 방어 태세를 수시로 점검하였어. 나아가 빗발치는 반대를 무릅쓰고 ‘기유약조(1609)’를 맺어 왜와 국교를 재개하였는데, 이것은 왜와의 관계를 안정시켜 후금의 위협에 대비하는 데 집중하기 위함이었지. 광해군이 후금에 대해 잘 달래는 정책을 펼친 덕분에 두 나라 사이에는 평화가 유지되었지만 명과 후금 사이에서는 여전히 긴장 상태가 지속되었어. 당시 명나라를 섬기던 조선의 상황을 생각하면 명나라와 후금 사이의 긴장과 충돌은 곧장 조선에게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었어.

명이 조선에 지원을 요청함.
1618년, 마침내 후금의 누르하치는 명나라의 무순성을 공격하여 점령하였어. 명나라는 전세가 불리해지자 조선에게도 국서를 보내 즉각 구원병을 뽑아 대기하라고 요구하였어. 자기들도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 주었으니, 이번 기회에 은혜를 갚으라는 것이었지. 조정의 신하들은 과거 임진왜란 때 조선에 지원병을 보내 준 명나라의 은혜에 보답해야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지. 하지만 광해군은 명의 지원 요청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어. 오랫동안 후금과 명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광해군은 명나라가 후금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 명이 '지는 해’라면, 후금은 ‘뜨는 해’였어. 점점 성장해 가는 후금의 심기를 건드리는 것은 위험하다고 판단한 거지.

“명나라는 지는 해이고, 후금은 뜨는 해와 같다. 우리 병사들을 보내 명나라를 돕게 하는 것은 농부를 호랑이 굴에 들여보내는 것이다. 소중한 우리 병사들을 죽음으로 내몰 수는 없다.”

또한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 후 피해 복구가 끝난 상태가 아니었어.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나라의 기강(규율과 법도)을 바로잡는 일이 더 중요했지.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나라에 지원군을 보낸다는 것은 아주 위험한 일이라고 생각한 거야. 뒷수습을 끝내지 못하고 있던 조선이 명나라에 군사를 보내어 또다시 전쟁에 휘말린다면 백성들의 생활이 어떻게 될지는 안 봐도 뻔한 상황이었어. 그리고 몸소 임진왜란을 겪은 광해군은 전쟁의 참상을 잘 알고 있었지.

광해군의 중립 외교
그래서 광해군은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 중립( : 어느 편에도 서지 않고 중간 입장을 지킴.) 외교를 펼치기로 했어. 광해군은 명나라에 보내는 답장에 “경솔하게 후금을 정벌하지 말고 다시 헤아려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구절을 집어 넣게 하였어. 그러나 명나라를 받들던 신하들은 작은 나라가 큰 나라에 대해 얘기할 내용이 아니라며 반대를 했지. 신하들은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를 갚기 위해서 즉시 군대를 보내야 한다고 주장하였어.

“의리로 보면 명나라는 우리에게 부모의 나라입니다. 임진왜란 때 은혜를 입은 처지에 자식으로서 부모의 부탁을 거부할 수 없습니다. 하루 빨리 명나라에 구원병을 보내서 조그마한 힘이라도 보태야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신하들은 당시 후금의 군사력은 생각하지 않고 후금이 오랑캐인 여진족의 나라라는 이유로 깔보고 있었어. 결국 광해군은 명나라에게 조선은 임진왜란을 끝낸 지 얼마 안 되기 때문에 군사를 보내 도울 형편이 못 된다며 군대 파견을 미뤘어. 만약 명나라를 위해 군대를 보내더라도 국경 지역, 즉 압록강을 건너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지.

명나라와 조선은 군신 관계이면서도 부자 사이와 같다. 만약 명나라에 변란이 발생한다면 우리 조선의 임금과 신하는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달려가서 선봉에 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 나라는 농병일치를 기본으로 하고 있어서 아침에 명을 내려 저녁에 모이기는 힘들다. 더구나 이번 누르하치는 천하의 강적이다. …… 과인은 병사 수천 명을 뽑아 명나라와 국경이 가까운 의주 등지에 대기하게 한 뒤 위엄만 과시하는 것이 지금의 상황에 적합할 듯 하다.
- 『광해군일기』

명의 요구와 신하들의 반발로 명나라에 군사를 지원함.
명의 계속된 요청과 신하들의 계속된 반발에 광해군은 어쩔 수 없이 군대를 보내야 했어. 그러나 광해군은 조선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후금에게도 '명나라에 군대를 보내는 것은 피치 못한 것’임을 알리려고 했지. 그래서 국왕 직속의 통역관 출신 강홍립을 명나라로 보내는 1만 구원군의 총사령관으로 임명했어. 광해군은 총사령관 강홍립을 몰래 불러 “정세를 잘 살펴 행동을 결정하라!”는 비밀 지시를 내렸지.

“그대는 명나라 장수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상황에 따라 신중하게 처신하시오. 만약 후금의 힘이 더 세다면 항복한 후에 우리의 파병이 명나라의 강요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이루어진 것임을 말해서 후금이 조선을 침략하지 못하게 하시오.”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후금 군대와 맞닥뜨렸을 때, 명나라 군대와 후금 군대 사이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어. 광해군의 예상대로 조·명 연합군은 날쌘 기마병 중심의 후금을 당할 수가 없었지. 전세가 후금 쪽으로 기울자, 강홍립은 광해군의 비밀 지시를 떠올리고 후금군에 투항했어. 광해군의 밀명도 있었고 당시 조선의 구원군도 목숨을 많이 잃은 상태였기 때문에 강홍립은 큰 피해를 막고자 재빨리 항복하였던 거야. 그리고 후금과는 원한이 없으며 어쩔수 없는 출병이었다는 의사를 밝혔지. 누르하치 또한 조선의 입장을 이해하였기 때문에 적대적인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지. 광해군의 이러한 정책은 명나라의 은혜를 배반하지 않고, 후금과의 관계를 악화시키지도 않는 결과를 가져왔어. 이러한 광해군의 실리( : 실제로 얻는 이익) 외교 덕분에 조선은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평화를 지킬 수 있었단다.

그러나 국내의 사정은 정반대였어. 명나라를 사대하던 신하들은 강홍립이 의리를 저버렸다고 비난하며 그의 가족을 잡아다가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러나 광해군은 강홍립을 변호하며 자신의 중립 외교를 계속 펴 나갔단다.

경들은 이 오랑캐 후금을 어찌할 것인가? 우리 나라의 병력으로 잠깐이라도 오랑캐를 막을 만한 형세가 된다고 생각하는가? …… 경들이 내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한갓 내 말을 틀어막아 우리 군사가 후금에 항복한 사정을 명나라에 알리려고만 드니 어찌 이런 어그러진 사리가 있는가? 내 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가?
- 『광해군일기』

이후에도 명의 원군 요청은 계속되었지만, 광해군은 이를 적절히 거절하면서 후금과는 친선을 꾀하는 중립적인 자세를 취하였어.

2. 인조 반정

광해군의 중립 외교는 당시 조선의 상황으로 볼 때 아주 적절한 것이었어. 가장 시급한 문제는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기 위해 무리하게 후금과 싸우는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입은 피해를 하루빨리 복구하고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 것이었잖아. 하지만 일부 양반들은 명나라에 대한 의리와 명분을 내세워 광해군의 중립 외교를 비판하였어. 당시 조정에는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끼리 만든 무리가 있었거든. 이를 붕당이라고 해. 여기서는 광해군 대의 붕당에 대해서만 생각해 보자.

광해군이 북인을 지지함.
광해군 대에는 서인과 북인이 대표적인 붕당이었어. 광해군은 왕위에 오른 후 북인을 아주 많이 등용(인재를 뽑아 씀.)하였어.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피란했을 때 당시 세자였던 광해군이 피란 중에 분조(조정을 나눔.)를 이끌었고, 광해군과 함께 지리와 지형을 살펴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활약을 한 의병장들 가운데는 북인 출신이 많았거든. 북인들은 대체로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편이었기 때문이야. 그래서 광해군은 북인들을 더욱 신뢰하고 가까이 두었지. 광해군은 이들을 등용하여 전쟁 후 피폐해진 조선 사회를 개혁했어. 하지만 후궁의 아들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끊임없이 왕권에 대한 도전에 시달려야 했어. 북인의 지원하에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그들과 함께 왕위에 위협이 된다는 이유로 임해군과 영창대군 등 형제들을 살해하고 계모인 인목대비를 궁에 가두고 폐위시켰지.

서인의 반발
한편 자신들이 광해군의 정권에서 소외받고 있다고 생각하던 서인들은 다시 권력을 잡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지. 그래서 광해군의 중립 외교뿐만이 아니라, 광해군과 북인 정권이 왕권 안정을 위해 영창 대군을 죽이고 인목 대비를 서궁에 잡아 가둔 것까지 모두 들추며 비판하기 시작했어. 이복동생이든, 계모든 엄연히 동생이고 어머니였기 때문에 윤리에 어긋나는 극악무도한 행동이라는 이유였지.

서인이 인조 반정을 일으킴.
결국 이를 빌미삼은 서인들은 1623년에 반란을 일으켜 광해군을 임금 자리에서 내쫓고 인조를 즉위시켰어. 이 사건을 ‘인조반정’이라고 해. 서인들은 광해군을 왕위에서 몰아내며 다음과 같은 명분을 내세웠어.

첫째, (광해군은)오랑캐의 나라인 후금 사이에서 중립 외교를 펼쳤다.
둘째, (광해군은)민가 수천 채를 철거하고 궁궐을 지었다.
셋째, (광해군은)동생을 죽이고 어머니를 폐위시켰다.

이 중 첫째와 셋째 항목은 서인의 유교적 대외관과 윤리관에 따른 명분이었지. 이로써 명·청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명분보다는 실리를 추구한 광해군의 외교 정책도 막을 내리게 돼. 이후 광해군은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제주도로 유배되었고, 그곳 제주도에서 18년간 살다가 67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였어.

3. 척화파와 주화파

청(후금)과 사이좋게 지내야 한다고 주장한 이들이 주화파야. 전쟁을 피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바란 세력이지. 이와 반대로 임진왜란 때 지원군을 보내 주어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고 왕조를 잇게 해 준 명나라의 은혜(재조지은 : )를 잊지 말아야 하며, 오랑캐의 나라인 청(후금)을 배척해야 한다고 주장한 세력이 바로 척화파야. 이 두 세력은 광해군 대에서 인조 시대를 거치는 동안 팽팽히 맞서며 대립했지. 이들의 입장이 어떻게 다른지 한번 살펴보자.

[주화파(최명길 등) - 사이좋게 지내야 하오!]
우린 그동안 커다란 전쟁을 겪었소. 백성들은 먹고살기 힘들고, 나라는 부족한 세금으로 허덕이고 있소. 게다가 훈련된 군사도 많지 않소! 싸우기에는 너무 힘에 부치니 화해를 해야 하오. 일단, 청과의 싸움은 막고 후일을 도모해야 하오!

[척화파(김상헌, 윤집, 오달제, 홍익한 등) - 싸워야 하오!]
무슨 소리요? 청은 오랑캐의 나라가 아니요? 어찌 그런 나라의 편에 선단 말이오. 또 아버지의 나라인 명나라를 공격한 나라가 아니오. 절대 안 되오. 청나라를 배척해야 하오. 그들이 쳐들어온다면 싸워야 한단 말이오!

[네이버 지식백과] 광해군의 실리 외교와 인조 반정 (천재학습백과 초등 사회 5-2, 천재교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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